인천 판타스틱 웨이브 - 오숙진과 친구들
2014 ADO 레지던시 프로그램 예술 + 중구
도시 활성화 프로젝트
『인천 판타스틱 웨이브』_ 오숙진과 친구들
_ 오숙진(설치), 황은화(시), 석지나(그래픽디자인), 박문정(음악)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 23번길 80 스페이스 아도
www.adocreation.com
tel) 070-8823-0191
화-금 11:00 ~ 19:00, 토 12:00 ~ 18:00 일, 월 휴관
설치 - 오숙진 |
근대와 현대의
딜레마, 인천의 기억을
그리다
조아라 _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연구위원
1. 기억의 대장정
오숙진 작가의 전시회는 인천을 무대로 한판 춤판을 벌이고 있다.
에너지 넘치는 전시회의 무대인 인천은 다양한 기억이 병존하는 용광로이다.
오늘날 인천하면 떠오르는 차이나타운의 형성은 근대 개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화도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 하에서 개항된 인천에 청일 그리고 각국의 연합 조계지가 설정되었고 근대 항구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제물포 구락부를 중심으로 각국의 외교전이 펼쳐졌고 일본 제1은행을 중심으로 금융시장이 형성되는 한편, 항만 노동자의 주 요깃거리로 ‘근대의 패스트푸드’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인천은 식민지 조선의 근대적 딜레마를 안으며 낭만과 괴로움이 병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개항도시 인천의 모습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맥아더 장군과 자유공원이 차지하면서 인천은 인천상륙작전의 영광의 땅으로 기억됐다. 공업도시의 매연이 도시를 뒤덮었고,
해수풀장이 운영되던 월미도 유원지는 디스코 팡팡이 운영되는 놀이공원으로 바뀌었다.
최근 다시 차이나타운이 주목받고 일본식 거리가 꾸며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도심의 쇠퇴 때문이다. 인천 앞바다의 간척사업 끝에 인천공항이 건설되고 송도국제도시가 조성되었으며,
시청이 이전하면서 일찍이 개항의 중심지였던 제물포 일대는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위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근대 항만 창고가 아트 플랫폼으로 바뀌고,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 페루가 들어섰고,
최근에는 일본식 가옥으로 외관이 단장되면서 진정성(Authenticity)을 둘러싼 다양한 찬반양론이 제기되었다.
2.
인천은 ‘진정한’ 차이나타운일까?
“인천 차이나타운은 가짜야.
중국집밖에 남지 않았잖아.”
“무슨 소리야, 정부가 만들었으니까 유일하게 인증 받은 차이나타운인걸.”
“아냐,
여긴 진짜 중국인이 없어.
가리봉동이나 연남동이 진짜 차이나타운에 가까워.”
관광의 오래된 이슈인 ‘진정성’을 차이나타운에서 마주쳤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 공신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와 미디어가 인증한 ‘공신력’을 너무도 맹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차이나타운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정부정책으로 꾸며진 것이라는 이유로 가짜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인천 차이나타운은 오랫동안 차별정책으로 억압받던 화교의 후손(old
comer)들과 새로이 유입된 중국 본토로부터의 신화교(new
comer), 그리고 밴댕이 회 거리에 터전을 잡은 한국인 등 크게 세 그룹이 공동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갈등하는 공간이다. 정부의 프로젝트로 ‘차이나타운’이라는 테마파크가 만들어졌지만 가짜라고 단언하기 힘든 것은 지난 30년간 불리한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도 산둥 성 출신 화교들이 이곳에서 생존했기 때문이며,
이곳이 글로벌 시대인 오늘날 새롭게 기회를 찾아 이주하는 중국인 뉴커머의 새로운 터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여지는 있다.
구락부(倶楽部)라는 일본식 차음을 딴 클럽 건물과 일본식 가옥이 조성되면서 근대의 낭만은 살아남았으나,
치욕의 역사와 고된 고뇌의 역사는 우리 기억의 후면에 배치되었다. 공자의 석상이 조계지 경계 계단에 세워지면서 청일 조계지를 재조명하는 철학이 희미해졌다. 이곳은 과거 청일 조계지… 그러나 지금은 잘 갖춰진 테마파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창고는 아트플랫폼으로 살아남았으나,
지가가 상승하면 결국 주민이 거주하는 주택은 커피매장 또는 화장품 매장으로 바뀌고 말지 모를 일이다.
3.
현대의 딜레마,
혼돈의 인천
인천 자유공원에 올라서면 인천 내항이 한눈에 펼쳐진다.
차이나타운에 들어서기 전 큰 길거리에는 그물망 판매점이 늘어서 있다. 이것이 인천의 진정한 모습일까?
현재 인천은 인천 내항을 레저항만으로 바꾸는 청사진을 수립해놓고 있다. 도시공해를 줄이고자 함이나 항만 노동자로서는 반가운 소식만은 아닐 것이다. 레저항만으로 바뀐다면 그물망 판매장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월미도 모노레일은 부실공사와 바닷바람에 밀려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고, 역사거리 조성의 포부는 최근의 재정위기 속에서 삐거덕 거리고 있다. 차이나타운, 아트플랫폼, 일본인마을… 역사거리는 조성되었으나 외관은 남았으되 생활의 냄새는 점차 사라질지 모른다.
현대의 딜레마가 남아있는 인천, 그 안에 담긴 역사,
그리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기억들….
인천은 어떤 기억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인천 아시안게임이 끝난 오늘날 인천의 딜레마는 계속된다.
당신은 어떤 인천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영상 - 석지나 |
영상 - 석지나 |
작가노트 _ 오숙진
만남
중략…
갤러리 아도를 찾은 날.
근대건축물들이 늘어선 중앙동 거리는 왠지 모를 아련함을 주었다. 비록 이 건물들이 그 시대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대의 감성을 빗겨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사실이다.
길은 휑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이 거리에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거리 풍경 위로 어떤 음악이 흘렀으면 한다. 멜랑콜리한 시 한 구절도 필요하다. 읊조려지는 소리도 좋고 눈으로
읊을 수 있는 아름다운 활자여도 좋다.
이렇게 그림과 음악과 시, 그리고 디자인이 모였다. 마치 인천이라는 공간이 지난 시간 서로
다른 문화와, 계층, 사상들이 만나 서로 뒤엉켜 혼성의 문화를
만들어냈듯, 나 역시 예술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장르들을 불러들였다. 그림 그리는 숙진, 글 쓰는 은화,
그래픽 디자이너 지나, 음악감독 문정. 이렇게 "예술적인"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의 걸음은 월미도로 향한다. 진짜 인천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시 - 황은화 |
시- 황은화 |
월미도의
말괄량이들
사춘기를 갓 지난 소녀가 한껏 멋을 부려보지만 촌스러움과
어색함을 벗지 못하는 것처럼 인천은 그런 소녀를 닮았다. 인천의 마스코트 같은 소녀들이 월미도 디스코
팡팡 위에서 널을 뛰듯, 춤을 추듯, 튀어 오른다.
오래 전에 사춘기를 보낸 나로서는 소녀들도, 디스코 팡팡도, 월미도도, 인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앳된 얼굴에 화장을 하고 다리 속을 훤히 드러내는 소녀들은 불량식품처럼 값싸고
해로워 보인다. 음악은 그저 그렇고, 저 유명한 디스코 팡팡 DJ의 멘트는 저급하다 못해 모욕적이다. 낡고 때가 낀 놀이기구들은
지금 당장 멈춰 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뒤엉킨 놀이기구들 옆으로 주점들이 늘어서 있고, 또 뒤편으로는 모텔들이 있다. 짜고 습한 공기가 이 요란한 풍경들을
휘감는다. 몇 번을 다시 찾아도 월미도는 낯설고 불편하고 얄밉다.
중략…
그러나 어느 순간 월미도의 소녀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소녀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소녀들을 쳐다보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어떤 껍질 속에 살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가방끈이 길어지고, 외국물을 먹고, 예술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내 자신이 고급문화의 선두주자라도 되는 듯이 세련되지 못한 일상의 삶들을 무시했다. 무엇이 고급이고, 무엇이 저급인가.
무엇이 세련이고, 무엇이 촌스러움인가. 삶의
진정한 모습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저급과 촌스러움 속에 진짜 삶이 있다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분명 고급문화 불리는 것 속에는 자기 도취, 자기 만족, 자기 방어, 이런 겉치레들이 잔뜩 들어 있다. 나도 그런 겉치레 속에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고급문화라는 이름의 불편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있지만, 소녀들은 스스로 발가벗었고, 환희의 비명을
지른다. 저것이 삶이다. 어리거나 늙었거나 서로가 서로를
유혹하는 춤을 추고 비명을 지른다. 그렇게 다음 세대는 만들어지고 또 다음 세대도 춤을 추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이다. 삶의 에너지.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우주로부터 한 덩이의 에너지를 얻었고 존재 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에너지로 인해 살아간다. 기쁨의 순간에도 슬픔의 순간에도 이 에너지는 우리를 집어 던지고, 받아내고, 또 뒤흔든다. 마치 디스코 팡팡처럼. 그 위에 올라서는 순간 누구도 가만히 멈춰서 있을 수 없다. 쩍
벌어진 다리는 하늘로 치솟을 것이고, 머리카락은 얼굴을 뒤덮어 서로를 알아 볼 수 없게 할 것이다. 누구도 춤을 추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춤을 춘다. 삶이
스스로를 춤추게 하는 곳. 저급문화라고 얕잡아 보던 월미도 놀이공원에서 나는 삶의 민낯을 보았다.
더 이상 인천이 싫지 않다.
중략…
거대한
여인, 그 여인의 혓바닥
이제 갤러리 아도로 돌아오자. 디스코 팡팡이 거대한 여인의 혓바닥으로 변하여 갤러리로 들어왔다. 디스코
팡팡이 가진 ‘철학적’, ‘상징적’ 의미는 혓바닥으로 형상화 되었다. 거대한 여인은 인도 신화 속에
나오는, 근원의 바다 위에 잠들어 있는 비슈누처럼 태초의 존재이고 우주의 원초적 에너지 그 자체이다. 여인의 혀는 그녀의 심장으로부터 길게 빠져 나왔다. 그리고 입 안에서
말괄량이가 미끄러져 내려온다. 붉고 뜨거운 근육 덩어리 혓바닥이 요동칠 때마다 말괄량이는 튕겨지고, 내려앉고, 넘어진다. 혓바닥
위의 그는 기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고, 무심할 수도 있다. 말괄량이는 그 존재만으로 이미
완전하고, 족하다. 날름거리는 혀는 침샘을 자극하고 여인의
입에서는 침이 흘러내린다. 침은 점점 고이고 거대한 바다가 된다. 태고의
존재, 여인이 뱉어낸 침은 생명을 길러내는 어머니 바다가 되어 세상을 덮는다.
우리도 춤을 추자. 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흐느적거림이어도 좋고, 고달픈 삶에 바둥거리는
몸부림이어도 좋다. 여인의 혓바닥 위에서, 그저 그녀의 입
속에서 미끄러져 나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의미나 의의가 필요 없다는 듯 그 위에서 춤을 추자.
설치 - 오숙진 |
Comments
Post a Comment